꾸밈과 갖춤의 예술, 장황(粧䌙)

  • 등록 2008.10.09 21: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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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성에 더해진 격조 높은 장식예술의 완성

 
ⓒ 안하영 기자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소재구)은 2008년 9월 5일부터 11월 2일까지 ‘꾸밈과 갖춤의 예술, 장황(粧䌙)’ 특별전을 개최한다. 외교통상부의 ‘제2차 한·중·일 문화셔틀 사업’으로 공동 개최하는 이번 전시에는 우리나라 문화재는 물론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과 일본 큐슈국립박물관 소장 문화재가 함께 전시된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삼국이 공유한 장황 예술전통이 각국의 독자적 미의식 안에서 독특하게 발전하였음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일반적으로 ‘표구(表具)’라는 용어로 사용된 장황은 서화와 서책을 보존하고 장식하는 기술을 말한다. 삼국시대에는 서화미술과 기록자료에 장황이 필수적이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이후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고 특히 조선 왕실에서는 여러 가지 서화·서책·서지(書誌) 등의 장황이 실용성을 넘어 격조 높은 장식예술로 완성되었다.

이번 ‘장황’ 특별전은 서양식 장정(裝幀)에 익숙한 일반인들이 조선 왕실과 중국 청나라 황실 그리고 일본 근세 상류사회에서 제작·감상했던 서화 문화재를 두루 접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또한 두루마리, 족자, 첩, 책, 병풍의 전통 장황 형식을 살펴봄으로써 동양 전통 장황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제까지 전시 대부분이 서화·서지의 내용을 위주로 하였던 것에 비해 종이나 비단으로 보존하고 꾸미는 기술인 장황에 초점을 맞춘 것은 장황이 단지 미술품을 보존·장식하는 보조적인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또 하나의 당당한 예술임을 부각하기 위함이다.

한국 유물로는 국보 제131호인 ‘조선태조호적원본’, 보물 제931호인 ‘조선태조어진’을 비롯하여 왕실의 책봉문서인 ‘교명(敎命)’, 왕실족보인 ‘선원록’, 조선시대 왕들의 중요한 업적을 기록한 ‘국조보감’, 임금이 남긴 글과 글씨, 세계기록유산인 의궤 등 조선 왕실에서 정성과 예를 다하여 만든 원형을 그대로 장황 문화재를 전시한다.

중국 유물로는 뛰어난 예술적 감각으로 장황 예술을 집대성한 청대 건륭제 때 만들어진 서화작품과 예술성이 돋보이는 보관 상자가 함께 선보이며, 일본 유물로는 일본 특유의 장황 장식의 미를 보여주는 서화 족자, 서책을 비롯하여 일본 중요문화재인 ‘대마종가문서(對馬宗家文書)’를 엮은 두루마리가 전시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장황에 쓰이는 전통 종이와 다양한 무늬의 비단 등 재료와 독특한 짜임의 끈과 매듭 등 전통공예 제작 기술의 맥이 끊어졌다. 대신 일본식 용어와 기술이 내려오고 있는 현 상황에서 장황에 쓰인 종이와 비단, 부속구 등 각종 재료와 세부 물품들을 모두 선보이는 이번 전시가 전통적인 장황 용어와 기술을 되찾기 위한 첫 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주)오디엔케이의 디지털 이미지를 새로운 현대적 의미의 장황을 첨단 디스플레이를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그리고 한·중·일 삼국의 전통 장황에 대한 특별강연회가 9월 19일, 10월 17일 두 차례에 걸쳐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 안하영 기자
비단과 종이로부터 시작된 장황

장황은 종이와 비단에 표현한 글과 그림을 감상·보존·보관·이동하기 위해 가장자리와 뒷면을 튼튼하게 보강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동양의 문화로 발전하였다 장황은 실용적 목적 뿐 아니라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도 큰 가치를 두는 한편 서화, 건축, 실내장식과 함께 발전하면서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장황은 한나라 때 비단과 종이가 글과 그림의 바탕으로 사용되면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장황은 죽간(竹簡)이나 목독(木牘)의 단점을 보완한 두루마리 형식으로서 불경을 가로로 긴 종이에 쓰고 축을 부착한 경권(經卷)이었다. 두루마리는 탁자 위에서 횡으로 펼쳐서 보고, 말아서 휴대·보관했는데 뒷부분만을 볼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두루마리는 둥글게 말아서 보관하는 형태로 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상축의 중간에 명주 끈을 부착하였다. 그 끈 끝에는 놋쇠나 녹각, 상아 등으로 만들어 윗부분을 구름무늬 등으로 장식한 꽂이를 달아 부착한다. 중국의 경우 꽂이는 축두와 같은 재료로 만든다. 일본은 대부분의 두루마리가 꽂이 없이 매듭지어서 마무리 하고 있어 각국이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첩 장황은 두루마리의 불편함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적절한 크기의 면을 중첩해 필요한 부분만 펼쳐 볼 수 있는 것이다. 인쇄술의 발달과 문화의 대중화 현상은 첩에서 낱장으로 묶이는 책 장황을 촉발시켜 보다 다양하게 제본 방식을 전개시켰다. 한·중·일 삼국이 비슷한 형태를 이루었으며 책 장황은 본문에 두 장의 표지를 대고 묶은 선장이 대표적이다.

조선 왕실에서 제작한 귀중본의 경우에는 놋쇠나 무쇠 편철로 단단히 묶어 철장을 하였다. 한국의 선장이 5침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중국과 일본의 경우 4침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대표작품은 조선1613년 이성윤 위성공신교서, 카노 무네노부 요괴그림, 중국의 건륭황제가 쓴 라마설이 있다

한편 족자는 위·아래에 축을 붙여 세로로 펼쳐 보고 말아서 보관할 수 있는 형식으로서 감상 외에도 실내 장식의 용도로 쓰이면서 건축물의 규모에 따라 크기나 세부 장황면의 비례가 결정되었다. 나무틀과 같은 견고한 재료를 사용하는 병풍은 최고통치자의 공간과 존재를 상징하는 것에서부터 실내 건축, 장식의 일부로 활용되는 것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한 판으로 만드는 경우와 여러 판을 연결하여 완성하는 형태 등 용도와 장소에 맞게 적절히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족자는 글과 그림의 가장자리를 비단으로 두르고 축을 달아 매다는 기본 방식은 세 나라가 같으나 비단의 종류와 색상, 세부 장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족자는 대부분 푸른색, 미색 등 두 가지 색상에 은은한 문향의 비단을 사용하고 매듭술을 단다. 중국은 일색, 이색, 삼색의 비단 회장 방식이 있으며, 일본은 작품의 내용과 종류에 따라 비단 회장을 두르는 방식이 세분화 되었고, 금실로 짠 금란 등을 사용해 매우 화려하다.

또한 조선, 중국과 달리 풍대가 화면에 붙어있지 않고 별도로 떨어져 장식이 되어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조선1872년 조선태조어진, 남북조 일본 14세기 잇펜쇼닌의 초상, 중국의 강희황제 30세 무렵의 초상 등이 있다.

병풍은 크게 통판으로 만드는 방식과 두폭 이상을 연결하여 접고 펼 수 있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나뉜다. 중국은 병풍을 짜진 가구 안에 넣어서 장황하기도 하며, 일본 병풍의 경우 같은 주제의 여섯 폭 그림 병풍 2점이 한 쌍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 작품으로 조선 19세기 모란그림 병풍, 일본의 1784년 연꽃과 기러기 그림, 중국의 건륭황제 홍오청 건륭황제의 글씨와 홍오의 산수 그림이다.

중국의 장황은 동양 장황의 시초로 한·당의 초기에 발생해 송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북송 휘종제 황실 장황인 선화장(宣和裝)에서 높은 수준을 보인다. 또한 청나라 건륭황제 때 황실 장황은 이러한 선화장을 모델로 삼아 황제의 어필과 황실 수장품들을 장황하면서 중국 전통 장황의 마지막 절정을 보여주게 된다.

중국과의 긴밀한 문화교섭을 통해 일찍부터 장황을 시작한 한국은 조선 왕실에 이르러 국가 운영을 위해 적극적으로 장황을 활용하였다. 책봉문서인 교명과 공신교서 등을 두루마리로 장황하였고 어진이나 능비탁본 등은 족자로 꾸몄다. 또한 어필과 궁중의 다양한 목록 등은 첩으로 꾸몄고 방대한 국가기록물들은 책으로 장황하였다. 건축물의 일부분으로써 병풍도 활용되었는데 특히 궁궐 어좌 뒤편에 펼쳤던 오봉병이 대표적이다. 구자억 기자
구자억 기자 기자 ferrari-f50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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