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비사> 한국을 사랑한 미 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 이야기

  • 등록 2026.04.29 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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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대한민국이 지금 안녕하지 못하다.
     
특권과 반칙이 상식이 되어버린 이 비루한 2026년의 시대.  참으로 비루 하다.
잠깐만 검색해봐도 어떻게든 스펙을 만들어 미국 명문대로 유학을 보내 시민권을 쥐여주려 혈안이 된 자칭 '진보'들의 민낯을 매일같이 목도한다. 광장에선 반미(反美)를 부르짖으며 대중의 분노를 부추기지만, 정작 자신이 쥔 특권의 단 1그램도 내려놓지 않는 괴물들.

이 징그러운 위선의 시대에,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작은 공원 한구석에는 그들과 완벽하게 정반대의 삶을 살다 간 푸른 눈의 28세 청년 동상이 묵묵히 서 있다. 가장 화려하고 완벽하게 보장된 미래를 제 손으로 찢어버리고, 이름 모를 극동의 작은 땅을 고향이라 여기며 그 곳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총알받이가 되었던 사내.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다.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을 사랑한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

1922년 평양. 미국인 선교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여겼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평양의 골목을 누비던 그는, 태평양 전쟁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 해군 장교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까지 치러낸 참전 용사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학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까지 둔, 그야말로 미국 상류사회의 완벽하고 안락한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그가 도서관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무렵, 한반도에 전쟁이 터졌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이미 2차 대전에서 충분히 싸웠다. 넌 두 아이의 아빠다. 이제 너의 삶을 살아라."

하지만 쇼의 눈앞에는 자신이 뛰어놀던 평양의 골목과, 폭격에 무너져 내리는 한국인 친구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부모님과 아내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나의 고향 한국에 전쟁이 났는데, 제가 어떻게 마음 편히 하버드에서 공부만 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에 평화가 온 뒤에야 제 양심에도 평화가 올 것입니다."

그는 그 길로 미 해군에 자원 재입대했다. 한국어와 한국 지형에 완벽히 통달했던 그는,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정보장교로 발탁되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결정적 역할을 해낸다.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여도 충분했다. 지휘부에 남아 정보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공로는 넘쳤다. 하지만 그는 후방의 안전한 막사를 거부했다. "한국인 친구들이 죽어가고 있다"며 기어이 소총을 들고 최전선 해병대 수색대로 자원해 들어갔다.

1950년 9월 22일 아침.

서울 탈환을 위해 은평구 녹번리 일대에서 수색 작전을 벌이던 중, 적의 매복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가장 앞장서서 적진을 돌파하던 쇼 대위는 적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28세의 나이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버드의 빛나는 학위도,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의 품도, 차가운 서울의 진흙탕 속에서 피와 함께 식어갔다.

가장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부모의 태도였다.

보통의 부모라면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앗아간 한국 땅을 저주하며 미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군 군목으로 참전 중이었던 그의 부모는 아들의 시신을 본국으로 가져가는 대신,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했다. "한국을 사랑했던 아들의 뜻"이라는 이유였다.

그들은 슬픔을 원망으로 바꾸지 않았다. 아들의 핏값인 전사 조의금과 사재를 털고 지인들의 모금을 받아, 아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의 학교였던 감리교 대전 신학교(현 목원대)에 강당을 짓고 세브란스 병원 등에 막대한 지원을 쏟아부어 전후 한국 사회를 재건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미망인이 된 아내 후아니타 여사 역시 두 아들을 데리고 다시 폐허가 된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평생을 헌신했다. 대를 이은 이 숭고한 사랑. 쇼 가문의 후손들은 무려 60여 명이 넘게 한국의 발전과 안보를 위해 복무했다.

다시 2026년 4월의 봄날. 거리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밟으며 묻는다.

입으로만 반미와 정의를 외치며 뒤로는 온갖 꼼수로 이익을 챙기는 얄팍한 자칭 '지도자'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이 이방인 청년의 묘비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자가 있을까.

우리가 들이마시는 이 눈부신 봄 공기는 결코 하늘에서 거저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76년 전 은평구 길바닥에서 붉은 피를 쏟아냈던 푸른 눈의 28세 청년과, 아들을 가슴에 묻고도 기어이 이 땅의 헐벗은 자들을 안아주었던 진짜 어른들의 거룩한 영수증 위에 세워진 기적이다.

다 피지도 못하고 져버린 그 눈부신 청춘의 꽃비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고 아프게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원문]
"I cannot in good conscience return to my studies at Harvard while my birthplace is experiencing such a tragedy. I will not have peace of mind until peace is restored to Korea."

[해석]
나의 태어난 고향이 이런 비극을 겪고 있는데, 양심상 하버드로 돌아가 평안히 공부만 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 평화가 회복될 때까지 내 마음의 평화는 없을 것입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윌리엄 해밀턴 쇼가 부모님께 쓴 참전 결심 편지 중
한 문장이다
                                                          <*기자는 지인의 도음을 받아 이 글을 완성 한다.>

정성환 기자 jsh-08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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