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서파(功西派)의 영수 이귀(李貴)

  • 등록 2010.10.30 07: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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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李貴)는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 등 동인이 당쟁을 조장한다며 스승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자 상소를 올려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뒤 강릉참봉으로 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평양으로 피난한 선조를 찾아가 방어대책을 올렸다. 이어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임명되어 군사·군량·군마 등의 모집과 수송을 맡았다.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을 도와 모집한 군졸과 양곡을 개성으로 운반하여 한성을 탈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듬해 장성현감·군기시판관·김제군수 등을 거쳤다. 1603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그뒤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배천군수·함흥판관을 지냈다. 1616년(광조 8) 숙천부사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의 일파를 처형한 이유로 옥에 갇힌 최기(崔沂)를 만나보고 공초를 수정했다는 탄핵을 받았다.

1622년 평산부사가 되었고 1623년 김유(金瑬)·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과 함께 광조를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인 인조를 임금으로 추대했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이어 호위대장,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대사헌, 좌찬성 등을 지내면서, 반정에 참여한 서인계열인 공서파(功西派)의 영수로 활동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어영사(御營使)로 임명되었으나, 임진강에서 싸우지 않고 달아났다는 탄핵을 받아 백의호가(白衣扈駕)의 처분을 받았다. 1626년(인조 4) 병조·이조의 판서에 올랐으나 같은 해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을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도로 호종(扈從)했으나, 최명길과 함께 강화(講和)를 주장하다가 다시 대간에게 탄핵을 받았다.
김민수 칼럼니스트 기자 ssk01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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