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자 1860년대 이후 남하정책을 추진한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은 조선 왕실에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고 친일개화파 정권에 의해 눌려 있던 명성황후 세력과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사 K. 베베르는 미국 공사와 함께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을 권유했다. 이에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 건청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여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했고 친일 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의 실시를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을 재개했다. 그러나 명성황후 살해와 단발령은 반일 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을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친미·친러 세력은 새 정권을 세우고자 1895년 10월 12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친미파였던 이완용·이윤용 등과 모의하여 고조 광무제에게 접근, 안전을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할 것을 종용했다. 고조 광무제는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여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조 광무제와 순종 융희제는 극비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했다. 러시아공사관 이어 직후 개화파 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가 참형되었고, 내부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도망가던 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친미·친러파 인물들이 등용되어 내각을 구성했으며 친러내각은 을미개혁을 중단하고 내각은 의정부로 환원되어 전제권이 강화되었고 고조 광무제는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이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