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은 공자의 위패(位牌)를 봉안·향사(享祀)하는 대성전(大聖殿),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도서관 존경각(尊敬閣),유생 교육 경비 조달하는 양현고(養賢庫),동무(東廡)·서무(西廡),기숙사 동재(東齋)·서재(西齋)로 구성되어 있고 성균관의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제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유생(儒生)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大科 初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養賢庫)에서 담당하였다.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으며 장의(掌議)는 재회를 절대적으로 선도하며 학령(學令)을 어긴 유생을 문책하여 출재(黜齋:퇴학)할 권한을 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