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엽 칼럼니스트 ] 2025년 한·일 국교정상화 60년의 시간 위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외교는 누구의 몫인가?
정치가 불안정하고, 외교는 반복되고, 감정은 봉합되지 않는 이 장기 구조 속에서 지속성과 신뢰의 외교를 가능하게 한 주체는 누구였는가. 그 답은 단순하지 않다. 바로 정치권의 제도 외교와 시민사회의 윤리 외교가 병행된 이중 채널 외교였다.
2020년대 중반 한일관계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정부 외교는 공백을 드러냈다. 그때 움직인 것은 국회였다. 한일의원연맹, 한일협력네트워크, 의회 포럼 등 의원단 차원의 교류는 외교의 연속성과 회복력을 일정 부분 견인해왔다. 국회는 정부 간 외교가 막힐 때 비공식 대화의 통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의원외교는 구조적으로 제약을 안고 있다. 정부의 외교기조에 종속되기 쉽고, 정권 교체 시 지속성이 불안정하다. 무엇보다 국민의 감정과 거리두기 된 채 ‘대화만의 외교’로 오해받는 위험이 있다.
이에 비해 시민사회는 기억을 근거로 하는 외교의 다른 주체가 되어왔다. 지난 4월, 제4차 장생탄광 방문단은 일본 우베시를 직접 찾아 한일 잠수부가 공동으로 유해를 조사하는 상징적 현장을 만들었다.
정부는 외면했지만, 시민들은 떠났다. 민간 여성 다이버가 새로운 입구를 찾았고, 한국과 일본의 활동가들이 추도광장에 함께 섰다. 거기에는 정치도 없고 협상도 없었다. 다만 기억과 존엄, 책임의 외교가 있었다.
시민외교는 외교의 윤리성을 되살리는 통로이며, 국가가 실패한 외교를 대체한 주체적 개입의 기록이다. 이제 우리는 ‘누가 외교를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외교는 누구와 함께 해야 하는가’를 묻는 시점에 도달했다.
정치가 제도적 공간을, 시민이 도덕적 공간을 담당할 때 외교는 비로소 지속 가능성과 설득력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다.
국회와 시민은 외교의 양 축이다. 하나는 관계의 제도화, 다른 하나는 관계의 윤리화를 맡는다. 외교가 다시 신뢰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이 둘이 병행되어야 한다.
외교는 결코 정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특히 한일관계처럼 감정과 책임이 얽힌 외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시민은 묻고, 국회는 중재하며, 정부는 제도화해야 한다. 그 다층 구조만이 외교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외교를 다시 그린다면 그 설계도는 한 사람의 손이 아니라, 여러 손의 협력으로 완성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