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다시 사람으로…기억·책임·연대 위에 짓는 미래

  • 등록 2025.08.12 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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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기억 시대의 시민외교는 어떻게 국가를 바꾸는가



[ 김덕엽 칼럼니스트 ]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은 올해 정권은 바뀌었고, 외교도 달라졌지만, 과연 본질은 변했는가? 강제동원, 위안부, 역사 왜곡, 유해 미수습 등의 문제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반복되는 갈등은 단지 협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오래도록 외면해 온 질문 때문이다. "외교는 누구의 것인가." 이 질문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정치와 관료가 외교를 독점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기억을 품은 시민들이, 책임을 묻는 유족들이 연대를 행동으로 바꾸는 활동가들이 지금 이 시대의 외교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단순한 과거사의 반복을 넘어서 ‘포스트기억(Postmemory)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당사자가 아닌 세대가 기억을 이어받고, 그 기억을 자기 언어로 재구성하여 행동과 연대의 외교로 확장하는 시대다.

장생탄광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역사 현안은 이제 피해자 가족과 활동가, 연구자, 청년들의 손에서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방식으로 호명되고 있다. 올해 한국과 일본의 잠수사들이 함께 바다로 들어간 장생탄광 공동조사는 이러한 ‘기억의 실천’이자, 포스트기억 세대가 보여준 책임의 시민외교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정부 간 외교가 멈춘 자리에 시민사회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일본 우베시와 한국 유족단체의 협력, 한일 여성단체의 공동성명, 평화운동가들의 반전 연대, 청년들 간의 교류 캠프와 공동 역사탐방, 이 모든 것이 ‘공식 외교’는 아니지만 신뢰와 존엄에 기반한 진정한 외교였다.

공식 루트 바깥에서, 제도 너머에서 시민들은 외교의 윤리를 되묻고, 관계의 정의를 재설계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외교를 다른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합의 만으로 끝나는 협상은 더 이상 시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대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외교의 방법으로 기억을 존중하는 구조화된 사과가 필요하다. 그간 반복되는 사과와 번복은 국민 신뢰를 무너뜨렸다. 진정성은 언어가 아닌 제도와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무엇보다 다층적 외교 채널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시민사회, 지방정부, 의회 외교가 단지 '보완재'가 아닌 ‘외교 주체’로 설계돼야 한다. 공동 추모, 청년 교류의 일상화 등 외교는 선언이 아닌 습관이며, 평화는 의전이 아닌 기억의 공유로부터 시작된다.

한일관계 60년, 우리는 여전히 묻는다. 기억 없이 화해할 수 있는가?, 책임 없이 신뢰할 수 있는가?, 시민 없이 외교할 수 있는가? 이제 외교는 권위의 언어가 아니라 기억과 책임, 연대 위에 설계되는 인간적 관계의 기술이어야 한다.

국경을 넘는 손잡기, 세대를 잇는 기억의 계승, 공동의 고통을 공동의 미래로 바꾸는 실천. 올해의 외교는 다시 사람이어야 한다.
김덕엽 기자 editorkim12350@outl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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