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 남한산성 북한산성 전시를

  • 등록 2010.12.02 08:11:04
크게보기

백제는 132년(개루왕 5년)에 성을 쌓았으며 고구려 장수왕은 이 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의 북한산주로 예속하였으며 신라 진흥왕은 북한산 비봉(碑峰)에 순수비(巡狩碑)를 건립했다.조선 선조 대의 임진왜란과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부터 피난의 적소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1659년(효종 10년) 왕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명령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축하게 하고 임란이어처(臨亂移御處)로 하여 도성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어 축성이 논의되었으나 성은 쌓지 못하였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이 이루어진 것은 1711년(숙종 37년)이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는 강력히 지지했고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사직(司直) 이우항(李宇恒)도 성의 터를 시찰하고 돌아와 찬성의 뜻으로 보고하자 1711년(숙종 37년) 음력 2월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음력 3월에 축성의 착수를 명하니 음력 4월 시작하여 음력 9월 축조 완료하였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의 둘레는 7,620보(步)이며, 문(門)은 14개, 장대(將臺)는 3개, 곽성(郭城)은 26개, 우물 99개가 있었다.

1401년 요동을 다녀온 이자영의 보고에 의거하여 명나라가 조선을 침략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자 태종은 국경과 내륙을 막론하고 고을 별로 산성을 쌓고 기존의 산성을 개축하여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남한산성(南漢山城)도 이러한 국방정책에 따라 세종 대에 군사시설로 이용하기 시작했다.임진왜란 중인 1596년에 류성룡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고 1621년(광조13년)에 석성으로 개축 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일부 수축이 이루어졌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친명배금 정책을 취하여 후금을 크게 자극하였고 1624년 일어난 이괄의 난을 계기로 도성을 방어하고 유사시 왕이 피신할 수 있는 거처로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되어 1626년 공사 완료 후 광주목이 남한산성으로 이전했고, 수어청도 같은 해에 남한산성에 설치되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둘레도 6,927보가 되었으며 왕이 거처할 행궁도 인조 4년 성곽이 완성될 때 건축되어 상궐이 72칸 반,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이 건축되었다.
김민수 칼럼 니스트 기자 ssk0102@hanmail.net
Copyright @2012 더타임즈 Corp. All rights reserved.Copyright ⓒ

PC버전으로 보기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로 328 010-4667-9908 서울아00313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보도자료soc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