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 대한국 독도 간도 전시를

  • 등록 2010.11.25 08: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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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조선(朝鮮)에 파견되던 일본 외무성 관리가 일본 정부에 제출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가 된 시말(始末)에 대해 조사하고 울릉도와 독도(獨島)는 조선령이라고 결론지은 내용이 있으며 1877년 일본 최고 권력기관 태정관(太政官)은 태정관 지령문(太政官指令文)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獨島)를 조선국(朝鮮國) 영토로 인정했다.

고조(高祖)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환구단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체 및 영토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계승됐다.

한반도 간도(間島) 녹둔도 제주도 동해(East Sea)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고조 광무제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일(統一)했으며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勅令)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울릉군의 관할 구역으로 독도(獨島)를 포함시키고 대한국 관보를 통해 공포했다.

1946년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제주도,울릉도,독도를 일본에서 분리되는 땅으로 명시한 지령(SCAPIN) 677호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체 및 영토를 계승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는 1952년 한국 행정구역상 경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인 독도(獨島)를 포함하는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을 선포하고 1954년 독도(獨島) 남동쪽 암벽에 "韓國領"과 태극기를 새겨 넣었다.

1712년(숙종 38년) 청은 목극등(穆克登)을 조선(朝鮮)에 보내 백두산(白頭山) 주변의 국경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우라고 칙명을 내리고 조선은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군관 이의복(李義復)에 명해 이를 따르도록 했다.비문의 내용은 강희 51년 5월 15일 청(淸) 오라총관 목극등이 변방의 경계를 서쪽은 압록강(鴨綠江), 동쪽은 토문강(土們江)으로 분수령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이다.

간도(間島)는 1677년 이후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여 청국 사람은 거주가 금지되었으나 청국이 1880년 토문(土門)이 두만(豆萬)을 뜻한다고 주장하였고, 1881년 길림의 장군 명안과 흠차대신 오대장을 보내어 간도 침략에 착수하고 조선은 1883년에 어윤중·김윤식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간도에 대한 중국의 침탈에 항의했다.

1885년,1887년 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파견하여 감계회담(勘界會談)을 통해 청과 국경문제를 놓고 토문(土門)에 대해 규명하고자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1903년(광무 7년) 대한제국은 간도(間島)를 함경도로 편입하는 동시에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을 간도(間島)에 파견하여 치안 유지 및 한인 보호에 힘썼다.
김민수 칼럼 니스트 기자 ssk01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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