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義親王)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으며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궐밖으로 축출되었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에 추증받고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의친왕은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그 해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고조 광무제의 후궁 귀인 엄씨의 견제를 받았다. 2대 순종 융희제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귀인 엄씨의 견제와 이토 히로부미 일제 통감의 방해로 대한제국 황태자에 오르지 못하였다. 1910년 8월 경술늑약 늑결 이후에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대한광복운동가들과 비밀리에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묵묵히 대한광복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11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11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의친왕을 망명하게 하여 대한광복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김가진,전협(全協)과 망명을 모의하였으나 간도 안동에서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1919년 11월 20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다. 11월 25일자 독립신문 2면의 기사에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다.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지만 끝까지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일제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의친왕은 1945년 8월 대한 광복 이후, 11월 3일 임정 요인들이 환국, 김구·김규식 등과 면담하였다.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동궁에서 임어하다가 1955년 8월 16일, 서울시 종로구 안동궁에서 훙서하였다. 의친왕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옆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