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朴趾源)은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소설을 지었다. 이덕무·류득공·이서구·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다. 1780년 진하별사(進賀別使)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淸)의 베이징에 갔다. 5월 25일에 출발해 8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렀고, 10월 27일 한성에 돌아왔다. 이 연행에서 청의 문물과의 접촉은 이용후생(利用厚生)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박지원은 양반사회를 비판하고 사회모순을 지적한 호질(虎叱)·허생전(許生傳)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와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렸다. 1786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안의현감(安義縣監),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의금부도사·의릉령(懿陵令), 1797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下敎)에 응해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생산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과농소초(課農小抄)를 바쳤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