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 문화상품인 한류가 있어 세계인이 즐겁다. 한류(韓流)는 한국인, 한국 문화만이 창출해낼 수 있는 독특한 우리 것으로 세계화를 지향할 때 더욱 빛난다. 한류는 처음 일본에서 바람을 타기 시작하여 이후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유럽, 미주로까지 진출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너무나 한국적인 문화가 세계인들로부터 인정받고 동경의 대상이 되면서 외국인이 자국 문화와 다른 우리의 독특한 이문화(異文化)에 대하여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과정 속에 나라의 대외 이미지마저 향상되는 아주 좋은 일이다. 일례로 한류라 하면 88올림픽 이후 불기 시작한 외국인의 김치와 불고기 먹기가 대표적이었고, 90년대 이후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진한 감동을 주며 불을 지피고 있다. 이처럼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는 한류는 역사가 일천한 것 같지만 실은 아주 오래되었다. 한류가 일본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주 오랜 백제시대 때부터다. 백제 무령왕 때 이미 왜국에 5경 박사를 보내주어 그들의 문화를 살찌웠으니, 그것이 첫 번째 한류로 이를 받아 소화한 일본은 고대의 아스카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었다. 그때 카라스키(犂-한국식 쟁기), 카라고로모(한국식 옷)라거나 심지어 행정 용어인 코호리(郡-고을)라는 말까지 그대로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두 번째는 여.몽연합군에 의한 두 번에 걸친 일본침공 때 한류가 전쟁을 통해 일본에 불붙었다. 이때 두부(토오후), 간장(쇼오유), 된장(미소) 등의 식문화가 자연스레 일본으로 전파됐다. 세 번째는 한일 간 200년 이상 평화시대가 구축되면서 12차례나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한 기간이다. 통신사의 왕래는 에도막부는 물론 일본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 통신사가 큐슈를 거처 교토-비와코-나고야-에도(도쿄)에 이르는 동안에는 한류 붐이 절정을 이룰 정도로 많은 문인들이 달려와 조선 통신사로부터 시 한수를 받아가거나 자신들이 지은 글을 올려 평가를 부탁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처럼 고대로부터 주기적으로 일본에 한류가 전파될 때마다 큰 회오리바람 일으키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에도시대의 한류는 학문에도 크게 영향을 끼쳐 이황, 이이의 주자학이 일본에서 매우 유행, 그 중에서도 실용적인 양명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심지어 임진왜란 전부터 조선의 주자학을 배워 온 일본인 사야카(沙也可)는 한류에 남달랐다. 그는 조선을 어버이 나라라 여기며 일본의 조선침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명령에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으로 조선에 상륙하였으나 곧 탈출하여 귀순, 오히려 일본군과 싸웠다. 이에 선조는 사야카에게 賜姓하여 <모래에서 건진 금 같은 존재>라 하여 김해김씨라 하였다. 그가 한국명 김충선(金忠善)으로 우록김씨(友鹿金氏: 이미 가야를 기반으로 하는 김해김씨가 있어 이와 구분키 위해 지명을 사용)의 시조가 됐다. 공화당 때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치열씨가 그의 후손이다. 고로 지금 부는 한류는 일본에 있어 역사적으로 4번째 큰 파동에 해당된다. 이처럼 한류는 이웃 일본에 고대로부터 큰 영향을 끼치면서 알게 모르게 세계인들에게 공헌해 왔다. 이미 백제 무령왕 때부터 한류는 일본은 물론 오키나와(류큐), 곤륜(캄보디아), 필리핀 등과 해상무역을 통해 전해졌다. 이처럼 한류는 오래되었다. 때문에 역사가 오래된 한류를 발굴하여 다시 알릴 필요성도 있다. 이는 한류 붐을 하나의 현상에 그치게 하지 않고 경제와 연결시켜 극대화시키는 길이다. 그 방법은 역시 드라마나 영화화하여 세계인이 보게끔 수출하는 일이다. 일례로 백제의 무령왕 같은 경우다. 무령왕은 서기 462년 6월1일 일본의 각라도(카카라시마)에서 태어났다.『삼국사기』에 백제 제25대 왕으로 나오시는 분, 그가 바로 사마대왕이다. 사마대왕은 사촌동생이자 이복동생인 동성왕(말다왕)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501년 12월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나이인 40세가 넘어 왕으로 즉위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풍운의 대왕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특이한 출생 이력에 한성(서울)으로 되돌려졌다가 다시 오사카 지역으로가 백제 이주민의 리더인 왜왕무로 지내다가 나이 40이 되어 백가와 결탁, 폭군으로 변한 4촌 동생인 동성왕을 밀어내고 대왕으로 등극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도 드라마 소재로써 훌륭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의 후손들이 한일 양국에 걸쳐 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일왕가와도 관계 깊어 수도를 교토로 옮겨 헤이안문화를 꽃피운 환무천황의 모친인 고야신립(高野新笠:타카노노 니이가사)도 무령왕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다. 이는 현 일왕이 2003년에 기자회견으로 밝혀 인정한 사실이다. 무령왕이야말로 한류를 일본에 수출한 최초의 인물이요, 양국 우호관계를 구축한 고대의 한류스타다. 21세기 한일 양국 우호의 모델인물로서 무령왕 일대기를 배용준 같은 한류스타가 주역을 맡아 드라마나 영화화한다면 엄청난 반향이 있을 것이다. 한편 20여 년 전 홀연히 일본으로 떠난 교수가 있었다. 충북대학교에서 열정적인 강의로 명성을 날리던 김태창(金泰昌) 교수다. 영어, 일본어, 불어, 독일어 등 5개 국어를 통역 필요 없이 자신이 모국어인양 자유자재로 직청직역(直聽直譯:바로 듣고 바로 통역)하시던 강의모습은 그야말로 언어의 마술사로써 일본에서 공공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펠리시모라는 일본 기업이 1년 수익의 1%를 지원하여 만든 [공공철학 교토포럼]의 소장이다. 지금도 현역으로써 세계를 무대로 도처에서 포럼을 개최해가면서 인류에게 공공철학을 통한 다수의 행복추구와 인류평화를 전도하고 있다. 이미 공공철학에 관한 책 19권을 동경대 출판부에서 펴냈고, 포럼에서 발표된 내용을 3권으로 엮은 시리즈 모노가타리1『타자와의 만남(他者との出会い)』, 시리즈 모노가타리2『원형의 말(原初のことば)』, 시리즈 모노가타리3『저편으로부터의 소리(彼方からの声)』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일어로 2권까지 서평을 썼고, 지금은 3권 째를 읽고 있는 중이다. 그 책에서 주장하는 공공철학은 전체주의 시대에 행해졌던 멸사봉공의 시대가 아니라 이제는 공(公)을 버리고 개인을 살리는「멸공봉사(滅公奉私)」와 개인을 살리고 공이 도와주는「활사개공(活私開公)」과 공과 사가 서로 매개「공사공매(公私共媒)」함으로써 결국 행복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는「행복공창(幸福共創)」을 주창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행복공창은 3차원의 상관관계적인 실천 활동을 축으로 해서 행하는, 철학의 공동구축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미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오른 김태창 교수의 공공철학 사상은 모든 인류의 평화와 올바른 삶을 위한 새로운 철학의 패러다임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공공철학의 목표인 인류 다수를 위한 공공행복 창조를 위해서 김교수는 배용준 같은 한류스타를 활용하여 드라마나 영화로 단기간 내에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책을 읽게 하는 것보다 몇 천 배 위력적이라고 주장한다. 일본 현지에서 수많은 재일동포나 외교관보다 큰 위력을 발휘하는 한류스타를 봐 온 김교수이기에 더욱 그의 주장에 힘이 실린다. 21세기는 시청각에 의한 교육이 가장 효과적으로 공공철학도 한류스타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물론 공공철학을 후원하는 일본의 펠리시모라는 든든한 기업의 마인드도 인류를 위한 탁견으로 배울 만하다. 한류스타와 우리역사 속의 영웅은 물론 공공철학과의 만남도 꽤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