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엽 칼럼니스트 ] 국가인권위원회가 사실상 ‘국민 권리 구제의 최후 창구’ 역할을 내려놓고 있다. 최근 5년 통계를 펼쳐 놓으면 현실은 잔혹할 만큼 분명하다. 권리 구제율은 2020년 17.5%에서 2024년 10.2%로 미끄러졌고, 같은 기간 기각률은 25.4%에서 40.5%로 치솟았다. 각하와 이송까지 합치면 열 건 중 아홉 건이 실질적 구제에 이르지 못한다. 인권위 문을 두드리는 대다수 시민에게 돌아오는 것은 ‘인권침해로 볼 수 없다’는 관용구 한 줄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어디에서’ 무너졌는가이다. 검찰과 경찰, 정보기관 등 공권력 사건을 다루는 침해구제 제1소위원회의 권고율은 2024년 2.2%다. 1000여건을 다뤄도 권고는 20여건 남짓이라는 뜻이다. 아동권리위원회 역시 2020년 30%에 달했던 권고율이 2024년 9.4%까지 추락했다. 공권력의 과오를 통제하고 취약한 이들의 권리를 방패처럼 막아야 할 두 축이 동시에 꺼진 것이다. 차별 분야보다 침해 분야에서의 낙폭이 유난히 큰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권력과 맞서는 순간, 인권위의 손이 작아지고 가벼워진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수치는 조직의 철학을 말한다. 권리구제율이 떨어지고 기각률이
[ 김덕엽 칼럼니스트 ] 정부 전산망 대란이 발생한 지 시간이 흘렀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중앙대책본부에 따르면 시스템 복구율은 여전히 30%대 중반에 머물고 있고, 핵심 1등급 일부를 포함한 다수 서비스가 분진 오염과 장비 분해·세척·재조립 절차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 “복구 중”이라는 말이 길어질수록 국민의 시간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번 사태의 두 번째 진실은 상실 그 자체다. 대전 데이터센터 화재로 파괴된 시스템 가운데, 95개는 백업이 있었지만 유독 ‘G-드라이브’만은 백업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최대 858TB, 직원 17%가 쓰던 8년 치 내부 문서가 사실상 영구 소실됐다는 추정이 이어진다. “용량이 커서 백업이 어려웠다”는 해명은 2025년의 행정 IT가 내놓기엔 너무 낡은 언어다. 클라우드는 ‘무한 저장고’가 아니라, 표준화된 중복과 테스트가 있을 때만 신뢰가 된다. 세 번째 문제는 거버넌스의 왜곡이다. 정부는 등급(1~4등급) 기준에 따라 핵심부터 복구 중이라고 밝혔지만, 사고 이후 일부 시스템의 중요도 등급이 뒤늦게 낮춰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위기 때 등급이 바뀐다면 등급 체계는 국민에게 “무엇을 먼저 살려야 하는가”를 안내하는 나침
[ 김덕엽 칼럼니스트 ] 재난은 시스템을 멈추고, 정치는 사고를 키운다. 정부 전산망이 대규모로 멈춰 선 날, 국민은 창구로 몰려가 서류 한 장을 받기 위해 반나절을 허비했고, 사업 일정과 생계는 줄줄이 뒤로 밀렸다. 그러나 정치는 달랐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복구를 서두르고 대책을 약속하기보다, 책임의 화살을 서로에게 돌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기계는 식었고 서버는 재가동을 기다리는데, 유독 정치만은 뜨거운 말 폭탄으로 과열됐다. 정치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원인 규명을 의회의 책무로 명확히 하고, 국민 피해를 즉각 줄이는 조치를 법과 예산으로 뒷받침하며, 재발 방지 구조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회는 누구 책임이 더 큰지 공방을 벌이며 과거 정권과 현 정권을 오가고, 청문회와 국정조사라는 익숙한 의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시스템의 마비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책임의 마비다. 전산망 이중화와 재해 복구 체계의 허점, 발주와 유지보수의 관성, 감사와 점검의 형식화는 정권이 한두 번 바뀌었다고 새로 생긴 문제가 아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문서의 허풍은 살아남았고, 매뉴얼은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 사이 국민은 민원 하나를 위해 반차를 내
[ 김덕엽 칼럼니스트 ] 대한민국이 스스로 자랑해온 ‘디지털 정부’의 민낯이 드러났다.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정부24, 모바일 신분증, 국민신문고, 인터넷우체국 등 국민 생활과 직결된 70여 개의 서비스가 순식간에 마비됐다. 단 한 번의 불꽃이 국가 핵심 행정을 동시에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번 사고는 단순한 화재 사건이 아니다. 647개 업무시스템이 멈춰 선 사실은, 대한민국의 전자 행정이 얼마나 취약한 구조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서버와 UPS 배터리를 같은 공간에 배치한 기본적 안전 불감증, 위험을 알면서도 이설 작업을 늦춘 무책임, 이중화·재해복구 체계를 갖추고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한 무능. 이는 예측 불가능한 재난이 아니라, 철저히 예고된 인재(人災)였다. 더욱 심각한 점은 이번 사태가 ‘반복된 경고’라는 사실이다. 불과 2년 전에도 행정 전산망이 멈춰 전국적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재발했다. 이는 관리 부처가 교훈을 외면했음을 의미한다. “재난은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안일한 태도가 낳은 결과이며, 이는 국민을 두 번 배신한 것이다. 정부는 현재 ‘순차 복구’와 ‘불편 최소화’를 말하고 있다.
[ 김덕엽 칼럼니스트 ] 한국의 통신 3사는 매달 요금을 받아 가며 ‘국가 기반 인프라’를 자임해왔다. 그러나 최근 연쇄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은 그 지위가 과연 정당한가를 근본에서부터 의심하게 만든다. 지난 8월 SK텔레콤은 사상 최대 규모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로 막대한 과징금을 맞았다. 유출 범위는 수천만 명대에 이르고, 유심 인증키와 IMSI 등 핵심 식별정보까지 빠져나갔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조사 결과에선 더 참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화벽 설정 미흡, 계정·패스워드 관리 부실, 노후 운영체제 방치 등 ‘기초도 안 된’ 보안 통제가 적나라하게 확인됐다. 이 정도면 사고가 아니라 관리 부재의 결과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회사는 다를까. 아니다. 2023년 LG유플러스는 약 30만 명의 고객정보를 불법거래 사이트로 흘려보냈고, 제재를 받았다. 보안 거버넌스와 통지의무 이행 모두에서 실패한 전형적 사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KT에서는 특정 지역 이용자들을 겨냥한 무단 소액결제 피해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정부가 민관합동조사단을 꾸려 현장조사에 착수했으며, 일각에선 KT가 파악할 수 없는 기지국 ID를 악용한 이른바 ‘유령 기지국’ 수법 가능성까지 제기
[ 김덕엽 칼럼니스트 ] 지난 5일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를 보며 필자는 분노보다 깊은 수치를 느꼈다. 증언대의 수사관들이 국민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기억나지 않는다”를 주문처럼 반복하는 순간, 형사사법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신뢰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국민의 대표기관 앞에서 조차 사실 규명 의지가 보이지 않는 조직이 과연 정의의 이름으로 수사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는가. 서울남부지검의 관봉권 띠지 분실은 단지 종이 띠 하나의 소실이 아니다. 현금의 출처와 흐름을 특정해 수사의 방향을 잡아줄 핵심 단서가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검찰은 ‘경력이 짧은 직원의 실수’라는 빈약한 설명으로 사건을 봉합하려 했다. 국가 형사사법기관이 증거의 생명을 잘라냈는데 책임의 언어는 고작 ‘실수’였다. 이 대목에서 이미 감각은 무뎌졌고 윤리는 마비되었다. 청문회에서 마주한 풍경은 더 참담했다. 핵심 당사자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시 인지 없다”를 되풀이하는 사이, 국민은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 대신 조직을 보호하려는 본능을 보았다. 동일한 예상질문·답변지를 공유했다는 정황까지 더해지며, 진실을 찾는 대신 진실을 관리하려 했다는 의심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국회는
[ 김덕엽 칼럼니스트 ]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SK텔레콤에 사상 최대 규모의 과징금 1347억 9100만원과 과태료 960만원을 부과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이 사안을 다 말했다고 할 수 없다. 감독기관이 역대 최대라는 수식어를 붙였다는 건 처벌의 무게보다 구조적 실패의 깊이를 시사한다. 숫자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초대형 유출이 가능했고 무엇을 고쳐야 재발을 막을 수 있는가다. 이번 사고의 본질은 외부의 정교한 공격만이 아니라 내부 통제의 장기적 붕괴다. 조사 결과를 보면 계정정보 파일이 암호 설정 없이 관리망 서버에 저장돼 있었고, 핵심 시스템에서는 비밀번호 입력 등 최소한의 인증 절차도 우회 가능했다. 해커가 악성코드를 심는 데 활용한 운영체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취약점 경보가 나와 있었지만 업데이트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한두 개의 실수가 아니라 보안 기본 원칙의 체계적 이탈이라는 뜻이다. 피해 규모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다. LTE·5G 전체 이용자에 해당하는 2,324만 4,649명의 정보 25종이 빠져나갔다는 구체적 수치가 제시됐다. 휴대전화번호, 가입자식별번호(IMSI) 같은 식별 정보는 물론, 유심 인증키(Ki·OPc)까지
- 김진근 포항신활력플러스사업단장 - 대한민국 농업은 지금 거대한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고령화, 기후변화, 소비 트렌드 다변화로 생산·유통·소비 전과정이 바뀌고 있으며,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를 기회로 삼아 농식품 산업의 질적 성장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2025년 12월 시행 예정인 「푸드테크산업 육성에 관한 법률」은 생산 현장의 데이터·기술·가공·유통 혁신을 하나로 잇게 될 제도적 기반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산업법이 아니라, 농업이 식품산업의 중심축으로 자리잡는 중요한 계기다. 농업이 중심이 되는 포항의 미래 포항은 철강과 바다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벼·과채·참깨·고추·미역·다시마·멸치와 같은 다양한 지역 농수산물을 품고 있다. 여기에 해송이 자라는 산지, 깨끗한 해양환경, 온화한 기후가 더해져, 사계절 제철 원료를 생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이런 청정한 농수산물이 ‘원물’ 단계에서 제값을 받지 못하고, 부가가치가 타 지역 가공·유통으로 빠져나간다는 점이다. 따라서 포항 농업의 미래 전략은 지역에서 생산한 원료를 지역에서 가공·브랜딩·수출까지 완결하는 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농업 중심 푸드테크 전략 첫째, 원료의 품질 표준
- 주낙영 경주시장 - 올해 10월 말, 경주는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라는 역사적인 무대를 통해 세계로 도약합니다. 21개 회원경제체 정상과 각국 장관, 다국적 기업인, 언론인 등 약 2만 명이 방문할 이번 회의는 단순한 국제행사가 아니라, 경주와 대한민국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이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세계가 경주를 주목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평화를 품은 역사, 고유한 문화 정체성, 그리고 미래를 향한 경제 잠재력을 두루 갖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경주는 단지 시간이 흐른 도시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세계와 소통해 온 도시입니다. 석굴암과 불국사, 첨성대는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수천 년 전부터 세계와 연결되어 온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무력 대신 문화와 기술로 국가를 발전시킨 경주의 정신은 ‘지속가능한 번영’을 지향하는 APEC의 가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자 살아 있는 예술 무대입니다. 세계유산은 시민의 일상에 녹아 있고, 골목과 거리, 축제와 공연은 세계인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생생한 문화 콘텐츠가 됩니다. 이번 APEC을 통해 우리는 최신 시설뿐 아니라, 경주의 삶과 정체성을
[ 김덕엽 칼럼니스트 ]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은 올해 정권은 바뀌었고, 외교도 달라졌지만, 과연 본질은 변했는가? 강제동원, 위안부, 역사 왜곡, 유해 미수습 등의 문제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반복되는 갈등은 단지 협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오래도록 외면해 온 질문 때문이다. "외교는 누구의 것인가." 이 질문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정치와 관료가 외교를 독점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기억을 품은 시민들이, 책임을 묻는 유족들이 연대를 행동으로 바꾸는 활동가들이 지금 이 시대의 외교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단순한 과거사의 반복을 넘어서 ‘포스트기억(Postmemory)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당사자가 아닌 세대가 기억을 이어받고, 그 기억을 자기 언어로 재구성하여 행동과 연대의 외교로 확장하는 시대다. 장생탄광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역사 현안은 이제 피해자 가족과 활동가, 연구자, 청년들의 손에서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방식으로 호명되고 있다. 올해 한국과 일본의 잠수사들이 함께 바다로 들어간 장생탄광 공동조사는 이러한 ‘기억의 실천’이자, 포스트기억 세대가 보여준 책임의 시민외교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