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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대의 한류스타 무령왕!

일본 아스카문화의 원류!

 
▲ 소설 무령왕 
고대에도 한류스타가 있었다.

고대의 한일관계는 주로 백제와 야마토 정권과의 교류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고대의 한류스타 무령왕은 아주 잘 생겼다 전한다. 키도 크고 용모가 수려하여 백성이 잘 따랐다고 전한다. 즉, ‘삼국사기’ 무령왕 즉위 조에 의하면, “무령왕은 키가 8척이고 눈매가 그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고 평하고 있을 정도다. 21세기의 한류스타인 배우 배용준이나 장동건만큼이나 잘 생겼던 것 같다. 덕분에 일본열도에서도 분국왕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백제 본국 왕으로 등극한 후에도 덕치를 펴 더욱 안정된 나라를 이끌었던 원동력이었던가.

호감 가는 인상에 더욱이 마음도 인자하고 후덕하여 백성들을 사랑하니, 자연히 백제는 왕과 신하의 신의가 돈독함은 물론 백성들도 왕을 따르고 존경하였다. 이에 백성들도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하니, 한성 백제 멸망 후 생사의 기로에 섰던, 형편없이 추락했던 나라가 마침내 중흥을 일으켰던 것이다.

462년 6월 여곤(곤지왕)은 개로왕의 명을 받고 왜국으로 구원군을 요청하러 떠나는데, 항해 도중 규슈 지방의 각라도(各羅島-현재의 카카라시마)라는 작은 바위섬에 긴급 상륙하게 되고, 그곳에서 왕자가 탄생했다. 갓 태어난 왕자는 약속대로 다시 한성으로 돌려보내지니, 그 왕자 이름은 사마(斯麻)라 정해졌다. 이는 섬을 뜻하는 옛 우리말 ‘사마’가 그대로 호칭이 된 것으로 ‘섬에서 태어난 왕자’라는 뜻이다. 일본어 ‘시마(島)’가 백제어 ‘사마’와 관련 있음도 하나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사마왕(무령왕)이 어렸을 때 다시 일본 열도로 건너가 백제 이주민을 다스리던 ‘왜왕무’라는 학설의 근거는 바로 그가 중국에 보낸 상표문에 있다. 즉, 상표문 일부분을 옮겨보면, “......,그러나 구려(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를 보면 집어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중략 ......, 신의 죽은 아비 제(臣亡考濟, 제는 개로왕으로 본국 백제왕으로 즉위하기 전의 왜국 내 분국왕으로서의 ‘왜왕제[倭王濟]’를 말함)를 생각하면, 실로 (고구려) 침략자 원수를 분히 여기나 (우리 사신이) 중국으로 가는 길은 옹색하게 가로막히니, 활을 당기는 백만(고구려를 치자는 백만 병사의)의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싶으나, 별안간 아비와 형을 잃어(奄喪父兄, 475년 아차산성에서 고구려 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개로왕과 왜왕흥) 상중에 있으므로 이루려는 공(功)이 흙 한 삼태기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라는 부분이다.

즉, 왜왕무는 자신의 죽은 아비를 제(濟)라 분명히 밝히고 있다(‘신망제고’를 소진철 교수는 [망한 백제를 생각하면]이라 주장). 한편, 별안간 아비와 형을 잃었다는 ‘암상부형(奄喪父兄)’이란 용어가 바로 왜왕무가 어렸을 때의 백제 분국왕 무령왕이라는 근거다. 왜냐하면 왜왕무=웅략천황(정확히는 웅략대왕)이라는 일본 측 주장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사서의 기록을 보더라도 상기 상표문은 웅략과 부형의 혈연관계로 볼 때 전혀 맞지 않다. 물론 그의 부친과 형들이 함께 죽었다는 기록도 없다. ‘일본서기’ 기록에 보면, 그의 부친과 형들의 사망 연대는 수십 년 차이가 난다. 아울러 왜왕무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은 502년에도 보이는데, ‘일본서기’ 기록대로라면 같은 인물이라는 웅략은 이미 479년에 죽은 상태다. 때문에 일본 측이 주장하는 왜왕무=웅략 설은 하나의 억지 주장에 다름 아니다.

한편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상표문과 왜왕무가 송나라 황제에 보낸 외교문서는 상당히 닮아있다. 한 인물이 백제와 왜국을 오가며 상표문을 쓴 것 같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상표문 속의 ‘당솔소통(當率所統)’과 왜왕무가 송나라 황제에 보낸 ‘구솔소통(驅率所統)’이 거의 같은 뜻이며, 또한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도와준다는 뜻의 ‘신지수감(神祇垂感)’과 ‘복재(覆載)’란 단어사용이 거의 같다. 때문에 이 두 외교문서 작성자가 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개로왕과 왜왕무와의 긴밀한 관계도 함께 읽을 수 있다.

그가 바로 5세기 초부터 일본 열도에서 왜5왕이 정권을 이어가던 때, 백제 분국을 통치하던 왜5왕 중 가장 유명하고 훌륭했던 ‘왜왕무(倭王武)’였다. 왜왕무에서 ‘무(武)’자를 따오고, 백제왕 재임 시 중국 양나라로부터 제수 받은 ‘령동대장군(寧東大將軍)’에서 ‘령(寧)’을 따와 ‘무령왕(武寧王)’이란 시호를 사용하게 됐다는 소진철 교수의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무령왕은 일본에 많은 관심을 갖고 혼란스런 정국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즉, 남제왕(계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신임장 형식의 우전팔번경이라는 구리거울을 하사하였고, 결국 계체는 왜 대왕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한편 512년 왜국은 백제에 사신 수적신압산(穂積臣押山:호즈미노 오미오시야마)을 보내와, 츠쿠시국의 말 40필을 받치면서 임나 4현을 양도하겠다고 보고하니,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장군 저미문귀와 주리즉이 등을 왜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516년에도 오경박사 고안무(高安茂)를 단양이(段楊爾) 교체요원으로 왜국에 파견하는 등 고대의 한류스타로서 많은 문물을 왜 열도로 전파하는데 힘썼다.

2002년 월드컵 한일개최에 앞서 2001년 12월23일 아키히토 일왕이 “옛 환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서 한국과 각별힌 인연을 느낀다.”고 한 발언 이후 2004년 8월3일 아키히토 일왕의 당숙(아버지의 사촌형제)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당시 62세) 왕자가 충남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을 참배하였다. 아사카노미야 일행은 참배에 앞서 오영희 공주시장에게 일본에서 가져온 향로와 향의 일종인 심향목을 기증하면서 “박물관이나 무령왕릉 등에 전시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당부하기도 했다한다. 심향목은 1300년 이상 된 향나무 뿌리로 만들며 태우면 연기 대신 그윽한 향내가 난다고 하니, 정성을 들인 큰 선물임에 틀림없다.

특히 아키히토 일왕이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 천황가와 혈연관계라는 돌발 기자회견에 일본 우익들은 ‘바보 같다’며, 혼절기미를 보이는 등 뒤에서 엄청난 비판을 퍼부었다고 한다. 일본 언론도 대부분 이 발언에 대하여 침묵하는 가운데 아사히신문만이 간단히 전했을 뿐이다.

당시 아스카 지역은 백제에서 건너간 곤지왕이 다스린 반면, 나니와(현, 오사카) 지역은 왜왕무(후일의 사마왕=무령왕)이 분국왕으로서 통치하였다. 곤지왕이나 무령왕 모두 일본 열도로 건너가 많은 백제계 이주민을 통치하던 담로의 수장으로서 야마토 정권과는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은 백제왕실과 야마토 정권 사이의 중간적 신분으로서 백제로부터 선진문화를 그들 원주민에게 전해주고 일본으로부터는 군사적 지원을 받았던 상호 협력관계였다. 아울러 야마토 정권 담당자들도 아키히토 발언으로 알 수 있듯 이미 백제왕실과 돈독한 혈연관계였음을 엿 볼 수 있다.

일본 아스카 문화 탄생에 크게 기여한 고대의 한류스타인 무령왕의 업적은 아들 성왕 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바로 불교의 일본 전파로 백제문화의 영향력은 왜 열도에서 더욱 큰 위력을 떨치게 됐다.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된 지 올해로 2553년이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세력권도 점점 동진하니, 한나라 명제(明帝, 58~75년)때 비로소 중국으로 전도된 불교는 거듭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중국 전진으로부터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전해졌고, 백제에는 384년 침류왕 때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와 불교를 전했다. 이후 백제는 왕실로부터 불교가 점점 융성해지고, 성왕7년(529)에는 수도였던 웅진(현재의 공주)에 대통사(大通寺)를 건립했다. 공주시 반죽동에 백제시대의 대통사 터가 있는 까닭이다.

백제 성왕은 538년 승려를 일본에 보내 불교를 전파했다. 이후 일본 왕실에서도 불교가 융성, 588년에 아스카데라(飛鳥寺-일명 法興寺)가 맨 먼저 백제인 소가(蘇我)씨에 의해 세워졌다. 한편 백제에서 떠난 배가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람에서 성덕태자가 백제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나니와(難波) 진(津)에 593년 사찰을 세우니, 그 절이 바로 유명한 오사카의 사천왕사이다. 성덕태자는 607년 아스카 지역에 또 하나의 사찰을 세우니 바로 법륭사다. 아무래도 이들 사찰은 열도로 옮겨간 백제 이주민 자신들과 야마토 왕권을 위해 지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일본의 아스카 문화는 고대의 한류스타인 무령왕으로부터 문화의 젖을 먹고 발전의 힘을 키운 후 그 아들 성왕에 의해 불교문화까지 수급을 받아 급성장했다.

고로 한일 우호의 상징적 인물인 무령왕이야말로 그 후손을 양국에 둔 고대의 잘 생긴 한류스타임에 틀림없다. 무령왕이라는 걸출한 고대의 한류스타가 한일 양국에서 받았던 그 열기가 지금도 엄청난 함성으로 생생히 들려오는 것 같다.(더타임스, 장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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