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韓明澮)는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의기투합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했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 때 심복 참모로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에 임명되고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받았다.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가 1454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부승지로 승진했으며, 그해 가을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저지시켰으며, 사육신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었다.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지고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으며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다.1466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유교명(遺敎命)을 받들어 다른 대신들과 함께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서정(庶政)을 결재했다. 같은 해 남이(南怡)가 제거된 후 추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推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성종 즉위 후 병조판서가 되었고, 1471년(성종 2)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같은 해 대궐의 동·서쪽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청하고 직접 서영(西營)을 거느렸으며, 흥학(興學)의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성균관을 정비·확충하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