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덕(崔閏德)은 1419년(세종1년) 조선의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5월 14일에 조정에서 대마도의 정벌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해 음력 6월 19일 장천군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삼고, 영의정 유정현을 3도도통사로 하고, 참찬 최윤덕을 3군도절제사로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하였다.6월 20일에 선발대가 대마도에 상륙한 이후 본대가 뒤이어 상륙하여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수색하고 근거지를 소탕하자 왜구들이 산으로 달아나 방어하였다. 이에 26일에 왜구와 결전을 위해 전진하던 중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후퇴하였다. 최윤덕이 중요 길목을 차단하니 보름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항복을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항복을 받은 지 7일 만인 7월3일 거제도로 개선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이러한 포용정책으로, 오랜기간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2년(세종14년) 12월 9일에 평양감사의 보고에 야인이 경계에 침입하여 사람과 물건들을 약탈해가니 강계절제사 박초가 추격하여 사람들을 구하고 약탈해가는 물건을 다시 빼앗아 왔다고 하였다. 12월 21일에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가 침입하였는데 식량이 부족하여 4군 지역에 자주 침탈하였다.1433년(세종15년) 1월에 평안도 감사가 여연 강계에서의 전투에서 전사자 포함 75명의 피해를 보고했다. 11일에 평안도 절제사로 최윤덕을 임명하였다. 세종의 정벌의지는 확고하였고 최윤덕을 판중추원사 겸 영영변도호부사로 삼았다. 1433년(세종15년) 4월에 모든 군사가 강계부에 집합하여,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 겸 3군도통사로 김효성을 도진무로 하여 황해, 평안 양도의 군병 15,000명을 편성하여 드디어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유역으로 4월19일에 출진한다. 휘하의 절제사들을 7개의 부대로 나누어 여진족의 각 마을을 쳐들어가 점령함으로서 대승을 이끌었다. 이 전투의 공로로 5월에 최윤덕은 우의정에 오르고 여연·자성·무창·우예에 4군을 설치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