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鄭澈)은 1561년(명종 16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1567년(명종 32년)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를 하였다.1568년(선조 1년) 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다. 1578년 장악원정으로 기용되고, 사간·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였다.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된 후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작품을 썼다. 관동별곡은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면서 산수(山水)를 노래하고 또한 고사(故事)·풍속까지 삽입한 것이며, 훈민가(訓民歌) 16수는 백성을 교화(敎化)할 때 포고문이나 유시문을 대신하여 시조(時調)의 형식을 빌려 지은 것이다. 1583년(선조 16) 예조 참판이 되고, 이어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논척(論斥)으로 다음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가사 생활에 들어갔다.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1589년(선조 22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들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1591년(선조 24년) 건저 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어 명천으로 유배를 갔다가 진주(晉州)로 이배된 뒤 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었다.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하였으며 일본군이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충청·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