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柳成龍)은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156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대비가 죽었을 때 류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 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았다.1590년 예조 판서,이조 판서,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 문제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이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하여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1591년 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권율·이순신·원균 등을 천거했다. 이순신은 전라도에, 원균은 경상도에 각각 배치되었으며 이순신이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구원하였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조선의 조정을 총지휘하였다.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이순신과 권율 등의 명장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듬해 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직문하고 군량을 준비하다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만나 평양의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파주까지 진격하였다.이순신이 역모를 당하자 류성룡은 이순신을 옹호했고 정탁이 상소문을 올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조치해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대활약을 하여 조선을 다시 구하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