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륜(河崙)은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되었는데 명나라와의 표전시비(表箋是非)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언사가 있다고 하여 문서 작성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나라측의 강경한 요구에 하륜은 정도전을 보낼 것을 주장했으며 1396년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되고 이방원(李芳遠)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그 공으로 정종이 즉위한 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그해 대대적인 관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정당문학이 되었으며,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태종의 즉위 직전에는 정승 반열에 올라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1400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서 관제개편을 주도하고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우정승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관제를 개혁했으며,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楮貨)를 유통시키게 했다. 1402년(태종 2) 좌정승이 되었으며,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가 조선 왕조를 승인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왔다. 1405년 좌정승 세자사(世子師)가 되고, 다음해에는 중시독권관(重試讀券官)이 되었다.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등을 역임하고 1416년 70세로 치사(致仕)하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시문에 능하고 음양·의술·성경(星經)·지리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한(文翰)을 주관하여 동국사략·태조실록의 편수에도 참여했다. 한양 천도, 문물제도의 정비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 초기 명나라와의 여러 문제를 해결했고 태종을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