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趙浚)은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중용되어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올랐다. 1390년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했다. 1392년 7월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문하우시중을 거쳐 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었으며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는 등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세자 책봉·요동 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어 이방원(李芳遠)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1400년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 좌정승·영의정부사가 되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 되었다.조준의 정치이념은 인정(仁政)과 법치였다. 궁극적인 목표를 유교의 왕도와 인정에 두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경계를 바르게 하고, 기강을 세우는 문제를 강조했다. 주례(周禮)의 육전에 의하여 중앙 정치제도의 완비와 재상이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주장했다. 재상의 역할은 군자를 천거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군주는 적합한 재상을 얻어 함께 의논할 뿐이라고 했다. 주자학적 통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학교교육, 사회윤리의 보급에 주력했다.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고 국가의 치난(治亂)과 정치의 득실이 관련되는 곳이므로 근실하고 학식이 높은 사람을 교수관(敎授官)으로 삼아 학교교육에 힘쓰도록 했다. 교수관의 임무는 사서오경(四書五經)과 같은 경서를 읽도록 지도하는 것이었고 4품 이하의 관원을 모아 시험을 보게 하여 시험에 합격한 자가 제교(製敎)를 관장하게 하고, 합격하지 못한 자는 좌천시켜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도록 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을 통한 유교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여 가묘(家廟)를 세우고 기제(忌祭)를 지내도록 했으며 효자와 절부(節婦)를 뽑아 조세를 감면하고 정표(旌表)를 세우도록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