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휴(尹鑴)는 1660년(현종 1)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송시열 등 서인이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여 시행하자, 삼년상을 지내자는 참최설(斬衰說)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국에서 참최설은 남인의 서인 공격에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는데, 기년복제는 왕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사대부의 예(禮)를 왕에게 잘못 적용하여 왕의 지위를 낮추고, 왕의 법통을 둘로 나누어버리는 논리이므로 어떤 경우든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675년(숙종 1)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일어난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한 뒤,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자,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을 이끌며 활동했다. 이해 승정원 동부승지·이조 참의·대사헌·성균관 좨주 등을 두루 거쳐 이조 판서에까지 승진했다. 이후 대사헌·좌참찬·우참찬·형조 판서·우찬성 등을 번갈아 역임했다.재직중 지패법(紙牌法)·호포법(戶布法)·상평법(常平法) 등 부세제도 개혁안을 여러 번 제기했으나 지패법을 변형한 호패법(戶牌法)만이 시행했다. 도체찰부(都體察府) 설치와 무과인 만과(萬科)의 시행을 주장하여 북벌을 위한 준비를 주도했다.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간관(諫官)과 과거제, 그리고 비변사를 혁파해야 한다고 보고, 주례(周禮)를 원용한 공고직장도설(公孤職掌圖說)을 숙종에게 올려 그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1680년 영의정 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여했다고 하여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5월에 처형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