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安龍福)은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3월 박어출과 함께 일본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인슈(因州)로 끌려갔으며 호키슈(百耆州) 번주(藩主)가 막부(幕府)에 보고하자 막부는 설득하여 돌려보내라고 명령했고 6월 30일 안용복은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안용복은 호키슈 태수와 담판을 벌여서 막부로부터 울릉도, 자산도가 조선령 이라는 서계를 받아냈는데, 나가사키에서 대마도(對馬島) 영주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했다.대마도주는 안용복 일행 편에 울릉도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서찰을 보냈으며 조선 조정은 대마도로 보낸 답변에서 울릉도와 죽도를 서로 다른 섬으로 표현했다. 조선 조정은 호키슈에서는 안용복을 잘 대해줬지만 대마도에서 책망한 점을 알아내고 대마도 영주의 행동이 막부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대마도 측 사절에게 막부에게 대마도 영주의 행동을 밝히는 서계를 보내겠다고 말해 사절을 승복시켰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화답문을 고쳐서 울릉도와 죽도가 서로 같은 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일본인들이 조선 영토에 들어와 안용복 일행을 데려간 것은 실책이라고 했다.1695년 3월에 대마도 번주 소요시쓰구가 죽고 그 아우인 소요시미치가 대마도주에 올랐다. 그는 막부(幕府)와 만난 자리에서 죽도에 관한 질문을 받고 사실대로 답하였다. 1696년 1월 28일 막부는 일본인들에게 울릉도 도해를 금지했다. 그해 봄 안용복은 울릉도로 다시 가서 어부들을 쫓아내 오키 섬으로 가서 스스로를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道監稅官)이라 사칭하고 호키슈 번주와 만나 막부에게 대마도주의 죄에 관해서 상소할 것을 청하였고 막부는 울릉도로 도해했던 15명을 적발해 처벌했다고 한다.막부는 이듬해 울릉도 근처 출어를 금지하겠다는 사실을 대마도 도주를 통해서 공식으로 조선 측에 통보했으며 철종 대까지 울릉도(鬱陵島)에 대한 분쟁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