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응언(蔡應彦)은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초기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이진룡 의병부대의 휘하 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평안남도 · 강원도 · 황해도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에 황해도 안평의 순사주재소와 수안 헌병분견소를 공격하고 함경남도 마전도 순사 주재소를 급습하여 무기를 노획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1910년 경술늑약 늑결 이후에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하여 김진묵 의병장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3 - 4백명의 의병부대를 직접 이끌고 경기도 · 강원도 · 황해도 · 평안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근거로 효과적인 유격전술을 구사하였다. 1913년에는 황해도 대동리와 선암의 헌병분견소를 기습하여 일본군 헌병을 처단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평남 성천 산악지대를 근거로 치열한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20명 이상의 일본 군경과 일제에 동조하는 세력을 처단하였고 의병부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매진하였다. 이에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하여 적괴 채응언수색대를 조직하는 한편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1915년 7월에 부하를 이끌고 군자금을 받기 위해 평남 성천의 마을로 내려온 채응언은 지역 주민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 헌병대와 치열한 육박전 끝에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채응언은 살인 및 강도죄목으로 기소한 일본 법원에 불복하여 대한 광복을 위한 대한광복운동이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가혹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자살을 기도하는 등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채응언의 기개에 놀란 일제가 사형 집행을 서둘러 11월에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