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李東輝)는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분개하여 강화진위대 동지들과 항일의병봉기에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전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특히 구국교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강화와 평양 등지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세우고 국학 및 근대학문과 군사교육을 병행하여 구국인재양성의 요람으로 활성화시켰다. 1908년에는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한편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투옥되었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한 이동휘는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고, 1913년에는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권업회(勸業會)에 참여하는 등 한인의 자치와 결속을 도모하고 국내에서 전개하던 애국계몽운동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무장투쟁론을 구현하기 위해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건립을 추진하고 독립군을 육성하기 위해 대전사관학교(大甸士官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좌·우익노선과 외교독립론·무장독립투쟁론이 하나로 결집되어 상해 통합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총본부가 되었다. 1921년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갈등으로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