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한(金福漢)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요로 전국이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행동에 나섰다. 12월 1일 이설·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성에서 거병하여 창의소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거사는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한성으로 압송되어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조 광무제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는 중차대한 위기에 처하자, 12월 2일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자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구금된 김복한은 낙향하여 안병찬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1906년 5월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한 의병 부대가 홍주성을 점령하였으나, 홍주의병도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김복한은 의병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파리강화회의에 대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영남과 호서의 유림들이 연대하여 연명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냈으며 이 파리장서운동으로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