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하(李命夏)는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늑약이 강제 늑결되어 국권이 위협받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과감히 관직을 버리고 쓰러져가는 국권을 바로 잡고,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류인석의 문하로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하여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군경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친일관리들을 숙청하여 민족의 기를 드높였다.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1907년 말 13도창의군을 결성하여 한성진공작전을 전개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강년 의병장의 지시로 각지로 다니며 의병운동의 재기를 촉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 경술늑약이 늑결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진룡 의병장과 함께 무장투쟁을 계속하여 갔다. 국내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 일대의 의병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단을 창단하고, 무장대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대한독립단 무장대(武裝隊)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의주(義州)·철산(鐵山)·용천(龍川)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조직인 보합단(普合團)과 연계투쟁을 전개하면서 의주·용천·선천 등지에서 친일파 관리들을 처단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지만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대한 보복인 일제의 경신대토벌로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변경지역은 물론 서간도·북간도 일대에서 무장투쟁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 대안 교통의 요충인 중국 단둥(安東)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겨서 동지들과 군수품 등을 마련하고 재차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중 일본영사관 경찰들과 격전을 벌여 일경들을 처단하였다. 이에 일본영사관과 평북경찰부 소속 경찰대의 추격을 받았고 1921년 3월 3일 일본경찰대의 습격으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결국 이 전투에서 이명하를 비롯한 15인의 독립군 용사들이 전사, 순국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