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金澈)은 1917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상해로 망명하였고, 1918년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초 선우혁·서병호 등과 함께 비밀리에 국내로 들어와 국제정세를 알리며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3·1 대한광복운동 봉기를 도왔으며 상해로 돌아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폈다. 그해 4월 10일 1회 임시의정원의 전라도 의원으로 당선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 제정 및 정부 조각에 참여하였고, 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5일 임시정부 교통차장에 임명되어 당시 취임하지 않았던 총장 대리를 겸하면서 활약하였다. 1922년 김구 등과 시사책진회를 결성하여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앞장서 추진하였다. 1924년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검사장, 1926년에는 국무령제 정부의 각료인 국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부흥에 힘썼다. 1930년에는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에 동참하고 국무위원제 정부의 군무장이 되었다. 1932년에는 상해 한인동포들의 권리증진과 생활안정을 위해 조직된 교민단체인 대한교민단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임명되는 등 임시정부와 교민단체의 핵심간부로 활약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에서 항주로 이동한 임시정부에서도 1934년 국무위원으로 재차 선임된 뒤 재무장의 일을 맡아 재정확보에 힘을 쏟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