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익철(玄益哲)은 1911년경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간도로 망명하였다.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 위폐를 시도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8년 다시 간도로 망명하여 서간도 흥동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썼고,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에는 서간도지역의 유력한 독립운동기관인 한족회,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여 독립군 활동을 펴면서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작전을 수행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간도로 망명하여 1924년 남간도 지역 독립운동 통합 조직인 대한통의부의 외무위원장, 1925년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 1929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과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7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1936년 말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해로 다시 망명한 뒤 임시정부와 함께 남경, 장사로 이동하면서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여 그 대표로 항일 민족역량의 통일을 위해 애쓰고, 앞장서 독립운동 정당 통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38년 5월 7일 불의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