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구(尹炳求)는 1903년 10월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에 조직된 한인 구국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05년에는 하와이 한인사회 대표로 선출되어 이승만과 함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하와이 한인 동포들의 독립요청서를 직접 전달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 이상설과 이위종이 1907년 뉴욕에 도착하자 이들과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한국 특사로 활동하는 등 우리 한민족의 자주독립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는 구국 외교활동을 전개하면서 미주 한인사회의 중추적인 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미주 한인들의 결합과 독립운동방안을 모색하고자 1908년 덴버에서 이승만, 박용만 등과 북미 대한인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중심으로 강제 병합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1912년에는 대한인국민회 2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미주 각 지역으로 순회강연을 다니며 미주 한인들의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인국민회 교섭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차 한인대회에 참가하여 미국정부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청원서 작성자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191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대한인국민회에서 처음으로 중앙총회장을 2번 역임하며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통합과 독립운동을 이끌어나갔으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직에서 물러난 윤병구는 미주 한인들을 규합하고 대한광복운동에 힘을 쏟았다. 1931년 일제의 간도 침략 항의서를 미국 후버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하였으며, 1943년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조직하여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한인 청년들의 안전과 미국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1945년 연합국이 국제연합(UN) 창설을 논의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개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단으로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연합국에 알리는 선전외교에 힘을 쏟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