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崔時亨)은 1861년(철종 12년) 동학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2대 교주가 되었다. 1864년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하였다가,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 울진으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썼다.1871년(고조 8) 이필제(李弼濟)가 그의 승낙 없이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여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자 소백산의 암굴에 피신하였다. 그 뒤 영월을 거쳐 인제에 가서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발간하는 등 경전을 완성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6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6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18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 등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및 탐관오리의 숙청 등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당하였다. 이듬해 2월 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여, 박광호(朴光浩)를 소두(疏頭)로 하여 각 도의 동학 대표자 40여 명을 보내어 고조 광무제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고 고조 광무제로부터 해산을 조건으로 선처를 약속받고 일단 해산했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다시 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보은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의 집결을 명령하였다. 교조의 신원과 부패 관리의 처단 및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 어윤중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 탐관이 파면되자 자진 해산했다.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건을 엄금하도록 시달했으나 1894년 고부 접주 전봉준이 농민과 동학도를 지휘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초기에는 그러한 폭력 사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후에 교주로서 이에 호응하여 북접(北接) 산학 동학도를 궐기시켜, 청산(靑山)에 집결했다가 회덕(懷德)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으나 관군과의 충돌을 피해 해산시켰다.그러나 각지의 관군을 격파하여 요구 조건의 이해를 수락받고, 동학군을 해산시켰던 전봉준이 일본군의 상륙과 정부의 요구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음력 9월 다시 기포(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였으며, 10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논산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하였다. 관군·일본군의 연합군과 공주에서 싸워 참패하고, 논산을 거쳐 장수 등지에서 연패하고 영동·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붙잡혀,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