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全琫準)은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게 하고 양민의 재산을 수탈하는 행위를 일삼았고 1893년 물세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만석보 밑에 다시 보(洑)를 축조하여 불법으로 세를 징수하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음력 2월 15일 동학교도를 이끌어 고부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세금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부패한 관리들을 붙잡았다. 음력 4월 26일에 백산 기포(白山 起包)를 일으켰고 보고를 받은 조선 정부에서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자 농민군을 해산하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으나, 이용태 역시 탐학이 심했으며 농민군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무자비한 탄압·처벌을 감행했다. 이에 재봉기를 결의하고 국가 정치와 사회제도의 전면 개혁을 단행하고 보국안민의 동학사상을 펼 뜻을 굳혔다.이해 음력 3월 동지 정익서(鄭益瑞)·김도삼(金道三) 등과 협의하여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동학교도를 주도 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진용(陳容)을 정비하고 고부의 백산(白山)을 근거로 8천여의 병력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동도대장이 되어 척왜(斥倭)·척양(斥洋)과 부패한 지배 계급의 타파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부근의 고을로 진격하여 관군(官軍)을 무찔렀다. 중앙에서 관군을 이끌고 온 양호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을 황토현(黃土峴)에서 대파하고 부안·정읍·고창·무장(茂長)을 장악하고, 음력 4월 28일 전주(全州)를 점령했다.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오고 동시에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압박함으로써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불량한 양반을 벌줄 것,노비 문서를 소각할 것,천민의 대우를 개선할 것,불법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없앨 것,일본인과 내통한 자를 엄중 처벌할 것 등 12개의 항목을 개혁할 것을 요구하고 휴전하였다.그 후 20여 명의 간부를 인솔하여 각지로 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 강화에 힘썼다. 정부의 관헌들과 대등한 처지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金鶴鎭)과 도정(道政)을 상의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차지했으나 부패한 지배 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 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이 유리하게 진전됨에 따라 점차 조선에서의 침략 행위를 더해가는 일본의 흉계에 격분하여 재봉기했다.전봉준은 음력 9월 삼례(三禮)에서 남도 접주가 되어 12만 명의 병력을 동원·지휘하여 북도 접주 손병희의 1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최고 교주 최시형의 총지휘를 받으며 항일 구국의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중부·남부의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이천(利川)·목천·공주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배하였고, 음력 11월의 금구(金溝) 전투를 최후로 분쇄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