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황(李斗璜)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 우선봉으로 공주전투에서 전봉준부대를 이인역(利仁驛)에서 격퇴하고, 전주를 탈환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이어 청일전쟁에 참전하여 통역과 정찰활동을 했다. 1895년 양주목사가 되었다가 일본인이 교관인 훈련대 2대대장이 되었다. 그해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친러,반일 정책을 취하는 명성황후를 일본 낭인패와 군을 동원하여 학살한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훈련대를 이끌고 광화문의 경비를 맡았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책임을 물어 정부에서 훈련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김홍집 이하 대신들을 해치려고 했으나, 부대가 해산되자 피신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조 광무제가 이두황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으로 피신해 일본 정부의 비호하에 생활했다. 1907년 순종 융희제가 황제위에 오른 뒤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특사를 단행하자 귀국하여 중추원 참의가 되고, 이듬해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었다. 한일 강제합병 뒤 전라북도 도장관으로 재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