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상(張建相)은 1916년 상해(上海)의 신규식(申圭植)으로부터 함께 일할 것을 희망한다는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이후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교육을 지원하였고, 동제사를 확대 개편시킨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동제사의 회원으로서 1917년 간도 안동현(安東縣)에 파견되어 영국상선 안동지사장 죠지 쇼우와 친교를 맺으면서 국내로부터 오는 김두봉(金枓奉), 김원봉(金元鳳)의 길 안내역을 수행했다. 김원봉과는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쌓으면서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창설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19년 3월 3·1 대한광복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을 위한 지원단체인 한인거류민단의 국민대회 준비위원에 선출, 김규식(金奎植), 여운형,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정 외무부(外務部) 외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임정의 외교활동을 수행했으며 여운형의 후임으로 임정 외무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7월 1일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를 부활시키고, 대한적십자사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1941년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이 되었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35차 임정 국무회의에서 외교연구위원,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3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학무부장(學務部長)을 역임했다.1943년 8월 인도주둔 영국군과의 군사합작으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가 파견되어 대적활동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1944년 4월 임정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1944년 4월 36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서 4차 개헌이 단행되어 약 20명의 국무위원들이 선출되었는데, 민족혁명당 소속으로 국무위원 겸 무임소장관에 선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