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趙明河)는 신천군청에서 일하던 중 독립 운동의 뜻을 품었다. 황해도 출신의 독립 운동가들인 안중근, 김구, 노백린과 송학선의 창덕궁 앞 사이토 총독 암살 미수 금호문사건(金虎門事件)의 영향을 받았다.1926년 9월 일본의 오사카 시로 건너가 야간학교를 다니며 고학을 했다. 그해 말에는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도 일어났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먹고 1927년 11월 중간 기착지로 대만에 들렀다.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인 육군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검열사로 타이완에 온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했다.조명하는 칼 쓰는 법 등을 익혀 준비한 뒤 1928년 5월 14일 독을 바른 칼을 들고 구니노미야의 행로에서 인파에 묻혀 대기하다가, 그가 무개차를 타고 지나가는 순간 차에 뛰어들어 독검으로 찔렀다.조명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7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은 뒤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