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주(尹世胄)는 1919년 한성에서 3·1 대한광복운동에 참가한 뒤 고향에 내려와 밀양 지역 대한광복운동을 조직했다.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19세로 나이가 어린 편이었지만 윤치형 등과 함께 대한광복운동을 주도했던 것으로 드러나, 궐석재판에서 밀양 대한광복운동과 관련자들 가운데 가장 중형인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았다.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김원봉이 그해 11월 결성한 의열단에 가입했다. 주요 기관에 폭탄 투척으로 테러 행위를 벌이기로 한 의열단의 윤세주는 신철휴, 윤치형 등을 국내로 파견되었으며 체포되어 1927년에 출옥했다. 1932년 윤세주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난징의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 전선을 구축한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에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등과 함께 핵심 인사로 참가했다. 이 조직에는 김구 계열을 제외한 좌우익의 많은 운동 단체들이 참여했으며, 1933년 발족한 민족혁명당의 모체가 되었다.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민족혁명당 편찬위원회 등에서 일하였다. 1941년 박효삼과 함께 화베이 지방으로 북상하여 팔로군과 공동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1942년 4만명의 일본군이 총공세를 벌인 태항산 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을 총지휘하며 일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