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鄭寅普)는 1913년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했다.귀국한 뒤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며 저술 활동을 했다. 일제 총독통치 말기에는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저항하여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은둔생활을 하다가 1945년 8월 대한 광복 후에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냈다. 광복 초에 정인보는 광복절노래를 직접 짓기도 했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여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발, 강력한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1946년 조선사연구를 저술했다.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정인보는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에 의해 삼고초려로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임영신의 독직 사건을 두고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