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金堉)은 1605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1605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른바 5현을 문묘에 모시는 5현 종사를 건의하였다. 1611년 정인홍 등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부황에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퇴교당했다. 이후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潛谷里)로 낙향,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조정에 나가 의금부 도사가 됐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피난했다가 돌아왔으며, 환도 후에 음성 현감으로 부임하였다.1624년(인조 2년)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정언에 임명됐다가 1633년 안변 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였다.1636년 명나라에 파견될 성절사(聖節使)로서 연경에 갔으며, 1637년 명나라에서 병자호란의 발발과 인조의 항복 소식을 접하였다.명나라에 다녀와서 남긴 조천일기(朝天日記)에는 그가 직접 목격한 명나라 관원의 타락과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를 기술하였다. 1638년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도내의 토지대장과 세금 징수상황을 점검하였다.1643년 한성부 우윤·도승지를 지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 가자 보양관으로 소현세자를 수행하였으며 귀국하여 우부빈객이 되었으며, 겨울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원손을 모시고 심양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귀국하면서 평안도 일대의 사신접대 폐단을 없애는 데 애썼다. 1645년(인조 23년)에는 관상감 제조가 됐다. 46년 민회빈 강씨의 처벌에 반대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입어 면직당하였다.1649년(효종 1년) 대사헌을 거쳐 의정부 우의정이 되고, 이어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다시 영중추원부사로 진향사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실록청 총재관으로 인조실록의 편찬을 맡아보았고, 1650년 대동법 실시 문제로 김집(金集)과 논쟁하였다. 1651년 상평통보의 주조를 건의하였고, 병자호란 때 소실된 활자를 새로이 제작, 많은 서적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1653년부터 시헌력이라는 새 역법을 시행하게 하였으며, 수레를 제작하고 관개에 수차의 활용을 건의하였다. 1654년 영돈녕부사, 1655년(효종 6년) 영의정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