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민(方漢旻)은 1920년 한성으로 올라와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며 항일기사를 연재하면서 일인을 "왜놈"으로 표현하는 등 일제를 통렬히 비난하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사를 특종으로 보도하는 등 일제와 친일파들의 죄악상을 폭로ㆍ단죄하여 민족의 가슴 속에 항일의 의지를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로 인해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고,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일제의 감시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항일투쟁활동을 위해 일본행을 결행했다. 1922년 4월 도쿄의 일본대학 사회경제학부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재일한인유학생을 모아 문화신문을 창간했다. 1922년 7월 니가타현(新瀉縣)에서 발생한 한국인 노동자 학살에 대한 진상 보도와 한인유학생 항의 데모를 주도했다.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대성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일제의 대성학교 폐쇄 조치 이후 김정기(金正琪)ㆍ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대성학교 내에 동양학원(東洋學院)을 설립하고 사회학과 경제학을 가르치며 교육구국활동을 전개했다. 1923년 8월 개산툰과 용정을 연결하는 천도경편 철도 개통 기념식에 참석하는 총독을 처단하고 일본영사관 및 은행 등을 폭파하여 민중 봉기를 도모할 준비를 진행 중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8년 6월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가출옥했다. 가출옥 후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던 중 경북 안동 출신의 사회주의자 안상훈(安相勳)의 열성자대회 사건(조선공산당 한성파 재조직운동)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1929년 6월 또 다시 붙잡혔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1937년 10월이 되어서야 출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