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심(吳光心)은 1934년 남편 김학규(金學奎)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국민부(國民府) 등 3개단체(三個團體)의 전권대표가 되어 임무를 띠고 간도에서 남경(南京)으로 갈 때, 동행하였다. 1935년 7월 남경에서 5당 통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립되자 부녀부 차장에 임명되어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김정숙(金貞淑), 조순옥(趙順玉)과 함께 여군복을 입고 광복군 창립식에 참가하였다. 중경(重慶)에서 창립식을 가졌던 한국광복군은 같은 해 11월 29일 서안(西安)에 본부를 설치하게 됨에 따라 서안(西安)에서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복무하였고 한국광복군이 편성됨에 따라 3지대장인 김학규(金學奎)와 함께 3지대의 간부로서 광복군 선전활동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초모 활동(招募活動)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초모 활동(招募活動) 대상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청년에 대한 초모 활동(招募活動)도 병행하였다. 한국광복군의 간부였던 오광심은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에서 한국광복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됨으로 우리의 혁명을 위하여,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광복군 대열에 용감히 참가하라고 강조하여 여성들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참여를 촉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