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직(鄭煥直)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이 되어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으며, 그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로 황해도에 가서 광부들을 거느리고 구월산 일대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 일본군의 힘을 빌리려 하자 일병의뢰반대소(日兵依賴反對疏)를 올려 그 부당성을 통박했다. 1897년 태의원별입시(太醫院別入侍)가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사 겸 토포사로 나가 치안을 확립했으며, 이어 시종관이 되었는데 그해 11월 태묘(太廟)에 불이 나자 고조 광무제를 업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고조 광무제의 신임을 받았다. 1900년 도찰사가 되어 부패한 경주부윤을 파면했다가 모함으로 옥고를 치렀으나, 풀려난 뒤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고조 광무제의 밀지를 받고 한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격문을 붙여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군자금을 조달했다.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1906년 3월 600여 명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켰다. 정용기가 1907년 4월 산남의진을 재건하여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위세를 떨쳤으나 강릉으로의 북상을 준비하다가 영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자, 귀향하여 산남의진의 대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다시 일으켰다. 영일의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근거지를 옮겨 무비(武備)와 군량을 갖추며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뒤 대구·경주·영천을 중심으로 영덕·흥해·청송·의흥·신녕 등지를 오가며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