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일(李鍾一)은 1882년 2월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같은 해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다. 1894년 보성보통학교(普成普通學校) 교장이 되었으며, 이후 경성시내의 7개 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896년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했고, 1898년에는 청년애국회에 관여하는 한편, 2월에는 류영석(柳永錫) 등과 함께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대한제국민력회는 독립협회가 해산되면 그 이념과 사상을 계승할 것을 확인했으며, 주말마다 실학사상·동학사상·동학교리 등을 강의했다. 러시아 세력의 침투 배격과 이권 수호를 주제로 한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국권수호와 이권의 양여 반대를 주장했다. 1898년 3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경성신문을 창간했으며, 8월에는 순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제국신문은 독립협회 여성회원들의 홍보지로서 민권운동과 여성의 사회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황성신문·만세보와 대한협회의 기관지인 대한민보 등에도 관여했다.1905년 12월 최학래(崔鶴來)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는데 손병희(孫秉熙)와는 이미 1898년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천도교에 입교한 뒤에도 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 겸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의 사장으로 계몽활동을 계속했으며 순한글로 논설을 썼다. 1906년 9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하여 평의원으로 계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1907년 조직된 대한협회에서 회보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으며,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서도 활동했다.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했으며,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창간했다. 3·1 대한광복운동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 6개월 만에 가출옥했다.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으로 한글맞춤법을 연구하는 한편 3년간 한국독립비사를 집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