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吳世昌)은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해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개발·식산흥업을 표방한 대한자강회를 조직했으며, 손병희의 후원하에 국민의 지식계발을 목적으로 6월 만세보를 발간하는 등 계몽운동·언론활동에 주력했다. 통감부가 1907년 8월 신문지법을 적용하여 대한자강회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11월에 남궁억(南宮檍)·장지연·윤효정·권동진·지석영(池錫永) 등과 더불어 대한자강회의 이념을 계승한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1909년 유길준(兪吉濬)과 융희학교(隆熙學校)를 설립하고, 장효근과 함께 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한 대한민보를 발간하여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자, 삼갑운동(三甲運動)을 추진하는 등 천도교 교단에서 활동했다. 1918년 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당시의 세계정세와 국내동향으로 보아 일대 독립운동을 일으킬 시기라고 생각하고, 최린(崔麟)·권동진(權東鎭)과 함께 독립운동 준비를 발의했다. 1919년 1월 초 국내에 들어온 도쿄 유학생 송계백(宋繼伯)으로부터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계획을 듣고 손병희(孫秉熙)·최린(崔麟)·권동진(權東鎭)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여, 운동의 3대 기본노선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으로 확정했다. 기독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비밀리에 접촉한 후, 손병희(孫秉熙)·최린·권동진(權東鎭)과 더불어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제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