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安在鴻)은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해 5월 비밀조직인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조직,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총무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다가 총독부에 의해 검거되어 11월 경상북도 경무부에 의해 대구로 압송되었고 재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1922년 출소 이후 1923년 최남선 등과 시대일보(時代日報)의 창간에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언론에 첫발을 디딘 후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냈다. 같은 해 9월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 겸 이사가 되었고, 1926년 9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이 되었다.1927년에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김준연·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홍명희·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지내면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벌여나아갔다. 1930년 1월부터 조선상고사를 시작으로 신채호의 저작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조만식·김성수·송진우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 물산장려회(物産奬勵會) 이사에 선출되었으며 국산품 장려운동을 주관하였다.1931년 5월 조선일보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재만주동포구호의연금 유용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1935년 5월부터 조선일보의 객원으로 민세필담(民世筆談)을 집필했다. 1936년 6월 중국 남경군관학교에 두 청년의 밀파 입학을 알선한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또다시 체포되었다. 임시정부와의 내통이 발각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38년 풀려났다. 1938년 5월 흥업(興業)구락부 사건으로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했다. 1920~30년대에 민족교육계몽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1940년대에는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하는 역사관을 확립하여 타 민족에 대한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민족사관을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