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申乭石)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독립운동이 봉기하자 1896년 3월 영해의병에 가담하여 중군장(中軍將)으로서 의병 100여 명을 이끌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을사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자금을 마련하여 1906년 3월 13일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기호를 내걸고 다시 기의했다. 영해·울진·원주·삼척·강릉·양양·간성 등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백두대간의 산간지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오르내리며 기습전을 펼치는 등 크게 활약했다. 1907년에는 영덕의 관공서를 격파했으며 영양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퇴각시켰다. 경주의 대산성에서도 수일 간 전투를 벌였으며 다시 영덕의 조현(鳥峴)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10월에는 영해경무서를 습격하여 일경을 추방한 후 수동으로 돌아가 군량을 모으고 군졸들을 쉬게 했다. 같은 해 12월 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13도의 의병이 연합하여 한성 공격을 목적으로 전국의 13도의병연합부대가 양주로 모여들 때,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올라왔다. 13도 연합의병부대의 각 도 의병대장은 양반·유생 출신의 의병장으로만 편성하였으므로, 부서개편에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의 부대는 제외되었다. 13도 연합의병의 한성 진공계획이 실행되지 못하자 영해로 돌아와 1908년 1월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3월 대규모로 투입된 적군에 맞서기 위해 안동·울진·삼척·강릉 등지의 의병과 합친 뒤 군세를 강화하여 춘양(春陽)·황지(黃池)·소봉동(小鳳洞) 등지에서 적을 격파했으며 울진 도곡(道谷), 평해 한곡(寒谷)·희암(喜巖)에서 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