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섭(金祉燮)은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김원봉(金元鳳)·곽재기(郭在驥)·김시현(金始顯) 등과 조국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짐하고,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 간도·상하이·시베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22년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상하이·베이징에서 활동했다. 같은 해 11월 장건상(張建相)과 함께 러시아로부터 선전비를 받아 독립운동자금에 충당하고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으며 이어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했다. 그 뒤 국내에서의 파괴 공작과 테러 활동에 주력했다. 1923년 3월 폭탄 30여 개를 상하이에서 국내로 보내기 위하여 안둥현에 중개소를 설치하고 김시현·유석현(劉錫鉉)·황옥(黃鈺) 등으로 하여금 한성으로 반입케 하여, 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찰서와 매일신보 등을 파괴하려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실패했다. 1924년 초 도쿄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일본의 총리대신과 총독을 비롯한 일본 고관들이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대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이들을 저격하기 위하여 도쿄에 잠입했다. 그러나 의회가 무기 연기되는 바람에 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궁성 이중교(二重橋)에 폭탄 3개를 던지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