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천(金敬天)은 1919년 2·8 대한광복선언을 계기로 귀국해 6월 초 이청천과 함께 간도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현역 일본군 장교인 김경천의 가세는 무장 독립 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1919년 말 경에 김경천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 총사령관으로서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1년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한국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말에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연해주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김경천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2년 이후로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