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춘선(具春先)은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한국인의 보호에 나서자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고 간도에 살고있는 한국인 보호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이범윤이 연해주로 망명한 후 한인보호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용정촌으로 거점을 옮겼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이 전개되자 3월 13일 길림성 용정에서도 한성에서의 독립선언에 대한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3월 13일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인사들이 대부분 참석한 가운데 독립운동을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조선독립의사회가 조선독립기성총회로 개편되어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이익찬·윤희준·방달성 등과 함께 용정에서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조선독립기성총회는 그 명칭을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으며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2월 연해주 방면으로부터 군총을 입수하여 독립군의 무력을 강화하였다. 같은 해 10월 29일 간도에 있는 간북대한의민회,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대한국민회 등이 병합하여 임시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총판부(總辦部)를 결성하였을 때 연길(延吉)·화룡(和龍)·돈화(敦化)·액목(額穆)을 담당하는 간북(間北),남부(南部) 총판부(總辦部) 총판으로서 부총판인 방우룡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0년 12월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할 때 참여하여 연해주로 이동하였다가 자유시참변을 겪은 후 다시 동간도로 돌아왔다. 1921년 12월 돈화현 양수천자(凉水泉子)에서 총판부를 조직하여 사관학교의 설립과 국내에 진공하여 일경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하마탕을 거쳐 왕청현 백초구(百草溝)로 돌아와 무장운동에서 종교운동, 교육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27년 국민회 동지들과 북간도 대한국민회 재건운동에 착수하였고, 1928년 11월 돈화현에 있는 마진에게 대한국민당 조직을 명하였다. 1934년 문재린 등과 함께 동간도 기독교 세력의 지하조직을 구축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