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韓龍雲)은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때 태화관(泰和館)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한용운은 여성해방운동과 농민·노동 운동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불교의 자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 법려 비밀 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신채호의 묘비 건립과 정약용 서세 100년 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 창씨개명(創氏改名)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