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직(林炳稷)은 1913년 이승만(李承晩)의 소개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여 편집장을 맡았다. 이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설립한 한인중앙학원·한인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했다. 1919년 국내에서의 3·1 대한광복운동 소식이 3월 중순 현순(玄楯)의 보고에 의해 미국 각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하자,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이승만·서재필(徐載弼)·조병옥(趙炳玉)·장기영(張基永)·김현철(金顯哲)·류일한(柳一韓) 등 150여 명의 재미교포·유학생들과 함께 한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의 앙양과 미국 여론을 환기시킬 목적으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여 서기장(書記長)으로 활약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근무하면서 대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했다. 1920년초 이승만을 수행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갔다. 1921년초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黃鎭南)과 파리·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 각국에 일본 침략의 만행과 대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재미한족연합회가 구성되자, 김호(金乎)·한시대(韓始大)·김병연(金炳淵)·송철(宋喆) 등과 집행부 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했다. 1942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김용성을 사령관으로 하는 한인국방경비대가 조직되자, 선전과 참위로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자, 상해 임시정부와 미국 정부와의 연락책임을 맡았으며, 1943년 임시정부 대통령 무관으로 임명되어, 전쟁 중 한국과 미국 간의 외교 교섭에 진력했다. 1944년 미국전략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임시정부 한국광복군과 연합군과의 국내침투작전을 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