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呂運亨)은 1918년 결성된 신한청년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1월 미국 대통령 특사 크레인에게 대한국의 독립청원서 2통을 건네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해줄 것을 부탁했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하여 대한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호소했다. 4월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을 설치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을 때 정부의 구성에 반대했지만, 임시정부의 1차 내각의 외무부 차장으로 참여했다. 11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로 건너가 하라 총리 등 정부 요인들과 회담하면서 대한국 독립의 정당함을 주장했고,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제의 대한국정책을 혹독히 비판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20년 미국 국회의원 사절단 100여 명이 상하이와 베이징을 시찰하는 동안 임시정부의 대표로 안창호와 함께 이들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고, 1921년 상하이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여 한국 독립과 중국혁명과의 유대관계를 위해 노력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피압박민족대회(遠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하여 5인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레닌·트로츠키 등과 만나 대한국 독립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11월 김구를 이사장으로 결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참여하여 장교와 기사(技師)의 양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1923년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촉진회를 조직했다. 1924년 중국국민당에 가입했고, 타스통신사 중국지부에 근무하면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와의 관계도 매우 밀접해져, 1925년 국내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승인에도 상당히 기여했다. 1926년 이후 중국국민당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북벌에 참가했고, 북벌과정에서 "조선병단"의 조직을 기도하기도 했다. 1929년 상하이복단대학 축구단을 인솔하여 동남아시아 각지를 순회하면서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정책을 통렬히 비난했다. 7월 상하이 요동운동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1930년 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아 복역하다가 1932년 7월 출옥했다. 이후 주로 국내에서 활동했는데, 국외에서와는 달리 합법적인 활동과 비합법적인 활동의 험난한 경계를 넘나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한 후 조선중앙일보의 본사와 각 지부에 독립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을 많이 배치하여 활동하게 했고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체육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에도 노력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보도에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이후 계속되는 탄압으로 1937년 11월에 폐간되었다. 여운형은 1940년 일본 도쿄로 가서 세계정세를 포착하고 유학생을 규합하여 인재양성을 위해 활동하다가, 1942년 일본에서 귀국하는 도중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1943년 집행유예로 출옥한 후 은거하며 청년 지도에 진력했다.1944년 건국동맹이라는 항일지하조직을 전국에 조직했으며 8·15 대한 광복 후 공백기간의 질서유지의 일익을 담당하며 안재홍 등을 비롯한 건국동맹원들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